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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들의 인생 이야기

내 개인적 삶은 비극으로 가득했어요 - 에이브러햄 링컨

by hodwoo 2020. 7. 7.

Q.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들도 다 등을 돌리거나 떠나갔어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에너지도 남김없이 소진되었어요. 당신은 이런 마음을 아실까요?

 


 

A. 직설적으로 말해서 죽고 싶다는 뜻이군요. 그 마음을 나도 아주 잘 압니다. 나는 평생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어요. 후대의 정신과 의사들은 내가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은 것으로 추정하더군요. 내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나를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이라며 칭찬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나를 롤모델로 삼는 정치인들도 봤습니다. 영광입니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 삶은 비극으로 가득했어요. 가난과 죽음과 이별이 나를 슬프게 했어요. 나는 1809년 방 한 칸 오두막에서 태어났어요. 읽고 쓰기를 참 좋아했지만 가난해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나를 따뜻하게 보살폈던 어머니가 내가 아홉 살 때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생긴 상실감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습니다. 9년 후에 또 다른 이별이 찾아왔어요. 새라 누나가 아이를 낳다가 숨졌어요. 

 1833년 스물네 살이던 나는 앤 루트리지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도 약속했어요. 나는 파란 눈과 하얀 피부의 그 여인과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앤이 고열로 사망하고 맙니다. 나는 어머니와 누나에 이어서 약혼녀와도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결국 결혼은 했죠. 1942년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메리 토드와 결혼해서 아들 넷을 낳았는데 둘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숨겼습니다. 그리고 나는 1861년 미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재선에까지 성공했는데 1865년 암살되고 말았어요. 돌아보니 비극적 사건이 많았던 인생입니다.

 

 

 

 

 내 삶 만큼이나 내 마음속도 비극이었어요.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나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봐야 할 겁니다. 많은 예가 있지만 30대 초반에 특히 심했던 거 같네요. 1841년 서른두 살이던 사업 파트너 존 스튜어트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인지 밝혔어요.

 

 "이제 나는 살아 있는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모든 가정에 똑같이 나눠주면 지구에 밝은 얼굴이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랬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비참하고 힘들고 괴로웠다고 나는 믿었습니다. 그즈음 친구들은 나의 정신 건강을 걱정했고 자살을 염려해 방에서 면도칼을 다 치웠습니다. 20대 초반의 나에게 영문법 등을 교습했던 스승 윌리엄 멘터 그레이엄도 내가 자주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했으니, 내게 삶을 종결시키고 싶은 욕망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의 우울증 치료란 육체적 가학과 다름없었죠. 피를 뽑았고 독한 물질을 마셔서 토하고 설사하게 만들었으며 또 환자를 굶겼습니다. 사람을 얼음물에 담그거나 매운 겨자로 몸을 문지르게 했어요. 우울증의 고통을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억누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평생 어둡고 우울한 내 마음이 내 인생을 망쳤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링컨의 우울증>을 쓴 미국작가 조슈아 울프 솅크는 말했어요.

 

 

에리브러햄 링컨 <1809.2.12 ~ 1865.4.15>

 

  

 "링컨이 우울증을 극복해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우울은 그가 위대한 일을 하는 원동력이었다."

 

 우울한 마음 덕분에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는 말이 궤변 같겠지만 타당합니다. 우울했던 나는 어린 시절 독서와 사색에 빠져들었습니다. 또 노예 해방과 평등과 정의 등 밝은 대의에 헌심함으로써 우울감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나는 유머의 기술을 터득했고 또 나 스스로 웃으려 노력했습니다. 나는 우울했기에 더 농담을 즐기고 더 깊이 사색했어요. 바꿔 말해서 우울감은 나의 내면을 깊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 나는 우울했기에 타인의 슬픔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슬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어요. 1862년 12월에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지지자였던 윌리엄 매컬리프가 남북전쟁 전투에서 전사했어요. 비통한 마음을 다잡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의 죽음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그의 어린 딸 패니가 슬픔에 빠져서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이었어요. 대통령이던 나는 뒤에 유명해진 위로 편지를 썼습니다. 이런 대목이 있어요.

 

 

 

 

 

 "지금 패니 양은 나중에 마음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그건 틀렸습니다. 분명히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 틀림없는 진실이에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슬픔이 줄어들 겁니다. 내가 겪은 많은 일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그러니 내 말을 믿어주세요."

 

 내가 그해 2월에 아들을 잃었다거나 평생 불행과 슬픔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생략했어요. 나는 패니 양의 슬픔이 깊지만 곧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경험을 통해 배웠던 바입니다.

 

 누구에게나 절망은 찾아옵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에너지가 소진되어 이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래도 아침이면 나아질 겁니다.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 내 말을 믿어주세요. 나는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평생 우울과 공포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으나 끝내 빠져나와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내 이야기는 최악의 우울증이 실은 무력하다는 걸 증명합니다.

 

 


 

 

< 에이브러햄 링컨 연보 >

 

1809, 2월 12일 켄터키주에서 출생.


1816, 사우스웨스트 인디애나주로 이주함.


1830, 일리노이주로 이주.


1834,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 지냄(~1841년).


1837, 변호사 자격증 획득.


1842, 메리 토드와 결혼.


1847, 연방 하원의원을 지내면서 
         미국-멕시코 전쟁에 반대함.


1855, 연방 상원의원선거에서 패함.


1856, 공화당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 패함.


1858, 공화당 상원의원후보로 민주당 S.A.더글러스와 
노예문제를 놓고 대토론을 벌임.
상원의원에는 낙석함.


1861,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
남북전쟁 발발.


1863, 《노예해방선언문》 공포.
게티즈버그국립묘지 헌정기념식 연설.


1864, 대통령에 재선됨.


1865, 남북전쟁 종식. 
4월14일 워싱턴 포드극장에서 피격, 
4월15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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